책장 넘기는 소리

라디오 라디오. 구효서

나침반테스 2006. 12. 23. 15:09

 

 

 

 

 

두부 한 모 크기만한 그 물건을 사려면 쌀을 달구지에 싣고 가야할 형편이었으니까요.

한 톨이라도 쌀을 아끼려고 끼니마다 반 넘어 감자를 섞는 사람들에겐

라디오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정도의 쌀이면 얼마나 오랫동안 흰 쌀밥을

계속해 먹을 수 있으며, 시루떡이 몇 시루며, 쌀막걸리가 몇 독이며 등등을

귀신같이 계산해 낼 줄 아는 어른들은 선뜻 광안의 쌀가마를 져낼 수 없었지요.

 

그래서 집집마다 라디오를 사기 위한 장기계획을 세우곤 했습니다.

이제 라디오 한 대를 위해 그동안 견뎌온 것보다 더 혹독한 내핍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라디오를 갖느냐 못 갖느냐가 그 집의 경제 사정을 말해 주는 지표쯤 되었으니까요.

                                                           

                                                                     구효서의 < 라디오 라디오 >

 

 

 

 

 

***  휴전선 가까이에 있는 한내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

병태가 바라보는 세상과 작가가 바라보는 마을이 모습이 징검다리를 이루며 한 챕터씩 엇갈린다.

북에서 틀어대는 대남방송의 폐해를 걱정해선지 전기가 늦게 들어온 지역이지만 오히려

대남방송을 거의 생활의 일부분처럼 들으며 살 수 밖에 없는 마을이다. 

 

라디오 연속극이 마을 사람들에게 공통의 화제거리가 되고 아이들까지 <삼현육각>이란 연속극을

기다리는 라디오 세상. 온통 라디오가 대접받던 시절의 얘기다.

거기에 신당을 지키는 미모의 묘선과 그를 둘러싼 남자들, 선우, 명덕, 중식의 관계가 재미를 더한다.

묘선은 대학생인 선우를 좋아하는데 집안의 반대를 마을굿 하던날 신내림넋두리로 해결을 본다.

그러나 외딴집에 든 무장간첩의 손에 묘선은 생을 마감한다.

 

그 즈음 마을엔 텔레비젼이 들어온다.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시선은 온통 그 곳에 쏠린다.

 

 

 

 

 

 

아름다운 문장

 

이십여 호 되는 한내 마을 고만고만한 지붕 지붕들은 서로가 멀어봤자 쇠바 두 기장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묘선이 홀로 섭생하는 신당은 빠른 걸음으로 걷더라도 마을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허영만이네

집으로부터 담배 두 대 참은 걸리는 굴헝에 웅숭거리고 있었다.

 

 

나무 위를 오를수록 땅은 빠른 속도로 깊어졌다.

나무에 오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오를 때마다 새삼스러웠다.

나무 아래서 올려다 볼 때의 나무와, 나무에 올라서 볼 때의 나무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다른 세계였다.

그것은 마치 항구에서 바다를 보는 것과, 바다에서 바다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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