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넘기는 소리

오후 네 시, 아멜리 노퉁브

나침반테스 2007. 1. 14. 00:11

 

 

 

 

나는 과거에도 그녀의 모든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 생각을 하면 목이 멘다.

<우리집>으로 이사온 후 처음 며칠 동안 우리가 무엇을 했던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너무나 하얗고 조용한 나머지 자주 걸음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태도로 서로를 마주 보았던,

숲으로 산책을 몇 번 나간 것 외에는.     < P 13 >

 

** 나는 고등학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다가 정년퇴직을 했다.

맘에 드는 전원주택을 구입하여 그 집에 든 흥분을 표현한 부분이다.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위에 인용한 글귀에 조금이라도 흔적을 느낄 수 있고

P 69 ~ P 72 에는 여리면서도 가냘픈 어린 시절의 사랑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나는 하마터면 그에게 이렇게 물을 뻔 했다. <무엇때문에 나를 보러 온 겁니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 말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워서 그만 가달라는 요구로 들릴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뻔뻔스럽게 행동할 용기가 없었다.   < P 29 >

 

** 평온한 나날을 보내며 <우리집>에 잠겨 지내는 우리(나와 아내 쥘리에트)에게 오후 네시에 방문자가

생겼다. 그는 우리의 고문자拷問者)가 되고도 남는다. 오후 네 시라면 오후의 차를 마시는 평화로운 시각이다. 그는 방문하여 별 말이 없다.

예, 아니오, 그렇소 외엔 다른 말은 모르는 사람인 듯이.

 

그는 내가 여기 산 지 일주일 만에 방문을 했고 매일 오후 네 시에 나의 집을 방문한다.

말없이 앉아있다가 정확히 오후 여섯시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선다. 매일 왔다가 두 시간을 머물고

돌아갔다. 그는 고통과 권태의 덩어리였다.

 

이쯤되면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진다. 재미있어서 밥 때를 놓치게도 된다.

그의 아내의 출현은 다시 한 번 더 소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그만 두면 나의 블로그 친구들은 책방으로 달려갈 것이다. "오후 네시"를 사러.

 

그의 아내와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고문자도 뚱뚱한 늙은이였는데 그의 아내는 의자 하나에 앉을 경우 엉덩이가 삼분의 일만 걸쳐질 만큼 비대하다.

다른 가족은 없다.

그의 방문이 두 달을 지날 때쯤

"썩 꺼져 ! 썩 꺼지지 못해. 다시는 오지 마. 또 오면 당신 머리통을 박살내 버리겠어 ! "< P122 >

이런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밀폐된 차고에서 자동차 시동을 걸어두고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가스에 질식사

하려다 나에게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간다.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를 돌보게 된다.

부득이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의 집은 집의 기능이 마비된 쓰레기장 그 자체였다.

버리지 못한 물건들, 버려야 할 박스들, 정리 안 된 옷들 가구들,

그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스물 다섯 개의 시계. 그는 시간의 노예였다.

 

그가 자살하려했던 의도를 존중하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자살을 만류한 나는 미안함을 느낀다.

그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팔라메드씨, 이제야 선생 뜻을 알았습니다. 이번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 P165 >

자실을 방관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편지를 보냈고

며칠 뒤 서로 대화를 나누며 나의 의견이 잘못된 것이 아니란 결론을 얻는 것까진 이해가 되는데

결국엔 그의 죽음을 도와주는 살인자가 되어버린다.

 

요컨대 내 행동은 보시(布施)였다. 진정한 보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법.

선의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찬탄을 받는 순간, 그것은 이미 선의가 아니다.    < P 1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