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넘기는 소리

구효서의 "인생은 깊어간다"에서

나침반테스 2006. 9. 2. 23:36

 

시골 한낮.

어린 아이들의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중천에 뜬 태양이 가지밭이나 고추밭에 헤설픈 금빛을 내려 쪼일 때 들려왔습니다.

앞뒤를 둘러봐도 온통 권태로운 초록투성이여서, 설핏 게으른 낮잠에라도 빠져들기 쉬운

시각에 그 소리는 시원한 소낙비같이 들려왔습니다.

 

'아이스께끼 얼음과자아아!' 라는 소리였습니다.

'자, 왔어요, 왔어. 울릉도 호박엿이 왔어요오오!' 라는 소리였습니다.

'뻥이요, 뻥튀기 튀겨요오오!'하는 소리였습니다.

무료한 한낮을 견디던 아이들에겐 산타클로스가 나타났다는 말처럼이나 반가운 소리였지요.

 

하지만 전 마냥 설렐 수만은 없었습니다.

아이스께끼를 사먹을 돈도, 엿과 바꿔 먹을 헌 병이나 고무신도 없었으니까요.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저는 부엌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간장과 석유 따위가 든 됫병을 우두커니 바라보았습니다.

헌 것이 되려면 아직도 먼, 댓돌 위의 고무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남들 다 튀겨 먹는 뻥튀기. 그러나 어머닌 도무지 튀겨주질 않았습니다.

튀겨달라고 조르면 야단만 쳤습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할 수 있었던 말은 한 마다였습니다.

"엄마, 저.... 순덕이네가요, 우리보다 부자에요?"

누가 봐도 순덕이네는 우리보다 잘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순덕이네마저 뻥튀기를 튀겨 먹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뭐냐는, 저의 눈물겨운 항변이었지요.

 

뻥튀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무신이 찢어져도 새로 사주지 않았습니다.

실로 꿰매서 신으라고 했습니다.

고무신이 낡아도 그것으로 엿을 바꿔 먹을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시골 한낮의 공기를 흔들었던 것은 아이스께기 장수만은 아니었습니다.

엿장수나 뻥튀기 장수만도 아니었습니다.

시골에는 가끔씩, 찢어지거나 구멍난 고무신을 때우는 땜장이도 나타났지요.

하지만 '땜장이'라고 부르면 그 아저씨가 싫어했습니다.

아이들은 그 사람을 '고무신 때우는 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고무신 때우는 아저씨가 감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제 어머니는 아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찢어지거나 구멍난 고무신을 들고 감나무 아래로 달려갔습니다.

전 그럴 수 없었습니다.

 

 

 

 

 

 

흰 실로 꿰맨 제 검정 고무신이 정말 남들 보기에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다 닳아서 떨어질 때까지 실로 꿰맨 고무신을 신고 학교엘 다녀야 했습니다.

주전부리하자는 것도 아니고 찢어진 고무신을 때우자는 건데 그것마저도 안 되는 거였습니다.

저는 가끔 심통을 부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매정하게 쏘아붙였습니다.

 

"그건 뭐 공짜로 때워준다니?"

저는 하릴없이 남들 때우는 고무신이나 구경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는 샌드페이퍼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아저씨는 미군들이 남기고 간 맥주깡통에 자잘한 못자국을 내서 샌드페이퍼를 대신했지요.

그걸로 찢어진 부위의 표면을 살살 문지릅니다.

본드를 듬뿍 바르고, 낡은 타이어 튜브를 적당한 크기로 오려 붙입니다.

 

그런 다음 고무신 모양의 알미늄 형틀에 땜질한 고무신을 밀어 넣고 나사를 조입니다.

작은 부뚜막같이 생긴 땜통 속에다 잘게 쪼갠 장작을 넣어 불을 지핍니다.

새로 댄 튜브 조각이 열기 때문에 고무신에 찰싹 달라붙지요.

땜질이 되어 나오는 고무신은 물론 새것보다야 못합니다.

그래도 볼썽사나운 바느질실을 감쪽같이 숨겼습니다.

 

소년은 그렇게 땜질되어 나오는 고무신들을 언제까지고 부러운 눈으로 지켜봤습니다.

아저씨가 일을 다 마쳤을 때 땜통 속에는 잉걸불이 남아 있었지요.

아저씨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이거 불이 아까운 걸. 너 개울에 가서 가재를 좀 잡아올 수 있겠니? 우리 그거라도 여기다 구워먹자."

가재 잡는 일이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좋아요."

저는 곧장 개울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재는 좀더 맑은 물 쪽에 살았습니다.

물 속의 돌맹이들을 열심히 뒤집다 보니 저는 어느새 개울의 상류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머잖아 크고 작은 가재를 여섯 마리나 잡았습니다.

가재들은 제 양 손아귀 속에서 집게발로 위협하며 꿈틀거렸습니다.

더 이상은 잡을 수가 없어 저는 개울을 따라 내려왔지요.

그러나 아저씨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감나무 아래엔 잉걸불도 깨끗이 치워지고 없었습니다.

 

 

 

 

 

 

그 곳엔 다만 제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아주 말끔하게 땜질이 된 채로.

저는 가재를 움켜진 채 동구 밖으로 내달아가며 외쳤습니다.

"아저씨이..."

서산엔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동구 밖 장승머리에 다다른 저는 어두워지는 허공을 향해 또다시 외쳤습니다.

"아저씨이...."

그러나 한길은 텅비어 있었고 아저씨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서산 위로, 부지런한 샛별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동구 밖에 서 있었습니다.  *

 

 

 

제가 엄청 좋아하는 작가분입니다.

그의 책은 나오는 대로 다 사보고 있죠.

최근간으로 "인생은 깊어간다" 중에서 "샛별"입니다.

그리 길지 않기에 일일이 다 제가 타자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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