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넘기는 소리

상처적 체질, 류근

나침반테스 2013. 9. 15. 18:03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 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페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