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넘기는 소리

무진기행, 김승옥

나침반테스 2008. 4. 7. 09:14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 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 소설의 초반부 인용 >

 

 

< 이모댁에 머물며 서울에서 상경하라는 연락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고향에서 자리잡은 친구도 만나고

후배도 만나고 후배와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음악선생을 만나고 음악선생과는 특별한 만남이 되기도 했고...>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을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 소설의 마지막 부분 인용 >

 

 

 

서울에서의 나와 무진에서의 내 모습이 다르고, 편지와 전보가 상반되게 표현되어 있다.

음악선생이 친구 조를 대하는 태도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또 다르다.

무진에서의 모습이 내 본연의 모습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난 서울로 향한다.

음악선생에게 일껏 썼던 편지도 찢어버리고...

무진을 떠나지만 내 안엔 안개가 자욱히 퍼져간다.

 

 

 

 

* 지은이가 순천에서 자라고 컸다. 그래선지 무진이 순천일 거라는 막연한 동경,

거기다 또 내가 순천을 동경하는 뚜렷한 이유있음에...

소설 읽는 재미가 각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