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넘기는 소리

시인을 찾아서, 신경림

나침반테스 2007. 2. 5. 16:57

 

 

 

 

70년대 초에 그는 충북 단양에 농장을 마련하여 내려가 농사를 짓는 한편 침술을 배워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민들을 치료했다. 물론 무료였고, 멀리서 찾아오는 환자에게는 잠도 재워주고

밥도 먹여주어, 마침내 신바이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런 생활은 작고하기까지 20년은 이어졌다. 끝끝내 시를 쓰지 않았지만 그 내력은 아무한테도,

아주 가까운 사람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 원인을 대개 두 가지로

짐작을 한다. 첫째, 그는 결벽한 사람이다. 시고 산문이고 잡문이고 번역이고 완벽한 것이 아니면

안하는 사람이다. 완벽한 것이 되지 않으니까 아예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경향신문 사건 때 그는 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하게 고문을 당한 끝에 밖에 나가면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강요된 각서니까 지킬 의무는 없다. 그러나 그는 그 각서를

쓴 일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정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죽어도 그따위 각서는 쓰지 않았어야 옳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쓴 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그는 그 각서를 지켜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노동(勞動)으로

 

내 노동으로

오늘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

..........

 

< 내 노동으로 > 부분

 

 

 

 

스스로 수천명의 병을 침으로 고쳐주던 그 자신이 췌장암에 걸린 것을 안 것은 93년 봄,

그 가을에 그는 세상을 떴다. 그가 남긴 유언은 쓸모가 있는 장기가 남아있으면 모두 기증할 것,

화장을 하여 농장에 뿌리고 무덤은 쓰지 말 것, 이 둘이었다.

그는 그가 죽은 뒤 시집이 만들어지기도 원치 않았다. 병석에서도 시집 얘기만 나오면

"쓰레기만 하나 더할 뿐'이라면서 사양했다. 그래도 평소 그가 자주 찾던 단양 남한강변의 언덕

근린공원에는 평소 단양인으로 자처한 그를 따르던 단양 사람들과 동료, 후배들의 성금으로 만든

시비가 새워져 있다. 역시 남한강변인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그의 농장에는 그가 애지중지하던 과수들이 돌보는 이 없이 스산하고,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면서 침을 놓던 집은 폐가가 되어 서 있다.

 

                                                      신경림의 < 시인을 찾아서 >   신동문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