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미친 건 사실이지. 우리의 대화 처음부터 나는 자네에게 엄청난 기회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네.
내가 내부의 적에 관해 이야기를 했을 때, 그건 내가 자네 밖에선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자네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일세.
그에 대해 자네는 잔뜩 거드름을 피워가며 자기는 그따위 내부의 적일랑은 안 키운다고 했지.
가엾은 제롬, 자넨 이 세상에서 가장 성가신 내부의 적을 가지고 있는 거라네. 바로 나 말이야.
아멜리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 - 소설 전체가 제롬과 텍셀의 대화로 이뤄져 있다.
인용한 부분은 텍셀이 제롬에게 얘기하는 부분.
** 참으로 흥미로운 소설 한 편을 만났다.그렇다고 흥미 위주의 소설도 아니고 추리소설은 더구나 아니다.
찐드기처럼 달라붙어 말을 시키는 이야기꾼의 얘기다.
출장길에 든 제롬은 비행 이륙시간 지연방송을 듣고 책이나 읽으며 기다리려는데 텍셀이 말을 걸어온다.
황당한 얘기는 시작된다. 텍셀이 일방적으로 제롬에게 말을 하도록 시킨다. 성가셔 하던 제롬은 대화의
한 중간에 빠져들고 그로 인하여 매몰되어 버리고 결국 자살에 이른다.
엽기적이고 주술적이다. 작가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감상할 수 있는 소설이다.
주거부정의 텍셀은 독신남이다. 20년 전 한 여인에게 일순간 필이 꽂혀 평생 결혼도 못했다.
몽마르뜨 공동묘지에서 만난 그녀를 사랑한다는 표현이 고작 강간이었다. 불쌍하게도 텍셀은 그 때의
첫섹스가 생애의 마지막 섹스였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여인을 찾는데 평생을 다 보냈다.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드디어 그 여인을 발견했다. 다음 날 차 마시러 와도 좋다는 초대까지
받게 된다. 그녀의 집에서 10년 전의 얘기를 나누다 결국 그 여인을 살해하게 된다.
그 살인 사건은 미궁에 빠졌고 텍셀은 오늘까지 건재하고 있다.
자 이제 텍셀과 제롬의 관계를 얘기해야 하는데 그저 비행지연 시간을 떼우느라 만나게 된 우연한 만남이 아니다.
공동묘지에서의 강간에 이어 독자들은 또 다시 계략적이고 황당한 지경을 맛봐야 한다.
텍셀은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비행기에 폭발물 설치 허위제보를 해서 비행기를 붙들어 맸고 제롬과의
대화장소로 더없이 좋은 비행장대기실을 택한 것이다. 어쩔 수없이 기다리는 일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장소로. 제롬이 바로 그 여인의 남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제목이 적의 화장법인지 알아봐야 한다. 철학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
적은 단순한 내 밖의 적이 아니다. 적은 대화에서 상대방이 될 수도 있고 내 안에 있는 자신의
허상일 수도 있다. 화장법이란 말도 미적인 범주를 벗어나 가면, 위장으로 해석하면 소설이해에
더 가까워진다.
<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
1999년 3월 24일,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의 이륙을 기다리던 승객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광경을 목도했다.
이륙 시간이 특별한 설명도 없이 세 번씩이나 거듭 연기되자, 승객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로비의 한쪽 구석으로 가 수차례에 걸쳐 무적정 벽에다 머리통을 들이받은 것이었다. 그는
어딘지 예사롭지 않은 난폭성을 보이며 잔뜩 흥분해 있었는지라, 감히 누구도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을 그 자살행위를 목격한 증인들은 자세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었다. 벽에다가
머리를 처박을 때마다 그 남자는 똑같은 고함소리로 자신의 동작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외치던 소리는이런 것이었다.
"자유! 자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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